들어가며

점심을 먹고 생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다’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어떤 바다를 떠올리는가. 잠시 생각해 보니, 내게 바다는 예전에 부산에 놀러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맑게 개인 하늘,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던 모래사장, 그 풍경을 하나의 장면처럼 붙들고 있던 시선, 그리고 그 곁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한데 겹쳐져 있었다. 나에게 바다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기억과 감각이 함께 묶여 있는 하나의 장면이었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바다가 궁금해졌다. 누군가에게 바다는 수평선 위로 번지는 저녁노을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심해의 어둠이나 바다 한가운데 놓인 외딴섬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파도 소리와 소금기 어린 냄새를 먼저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게나 해삼처럼 바닷속 생물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같은 ‘바다’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다는 서로 같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같은 말을 쓰는데도 왜 서로 다른 이미지와 감각이 가능한가. 여러 사람의 경험을 하나로 묶는 공동의 표지는 오히려 상상력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또 우리가 언어로 옮기기 이전에 먼저 마주하는 감각의 층위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설령 그런 층위가 있다 하더라도, 왜 우리는 끝내 언어를 떠나지 못하는가.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바다’라는 하나의 예시를 중심으로 따라가 보려 한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는 도구인지, 혹은 세계를 너무 빠르게 이름 붙이게 만드는 틀인지, 그리고 이름 붙이기 이전의 경험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철학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왜 같은 말 아래 서로 다른 바다가 가능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모두 ‘바다’라는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저마다 다른 바다를 떠올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언어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담고 있는지, 아니면 훨씬 느슨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묻는다.

로크는 언어를 인간의 마음속 관념을 전달하는 기호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다’라는 말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관념을 꺼내 보이는 수단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곧바로 어려움이 생긴다. 만약 모든 사람이 같은 단어에 정확히 같은 관념을 가져야 한다면, 실제 대화는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내가 떠올리는 바다와 타인이 떠올리는 바다가 조금만 달라도 우리는 같은 말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더 날카롭게 밀고 들어간 철학자가 버클리다. 버클리는 일반적인 단어가 하나의 추상적이고 공통된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바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나 똑같은 보편적 이미지 하나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어떤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그 말은 여전히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부산의 밝은 해변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깊고 어두운 심해를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해삼과 게가 기어가는 바닷속을 떠올려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같은 심상을 갖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바다’라는 말이 서로 다른 경험들을 완전히 일치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것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묶어 주는 표지로 기능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도 함께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말의 의미를 머릿속 이미지에서 찾기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서 찾으려 했다. 이 입장에서 보면 ‘바다’의 의미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특정한 사진 한 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행 이야기를 할 때도, 지리 수업을 들을 때도, 시를 읽을 때도, 두려움과 그리움을 말할 때도 ‘바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 아래 서로 다른 바다가 가능한 이유는, 언어가 하나의 고정된 내면 이미지가 아니라 여러 사용과 맥락 속에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결국 ‘바다’는 모두에게 똑같은 그림을 강요하는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기억과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완전히 같지는 않은 채로도 서로를 이해해 볼 수 있게 하는 느슨한 연결점에 가깝다. 같은 말 아래 여러 바다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어의 실패라기보다, 오히려 언어가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더 가깝다.

2. 공동의 표지는 상상력을 가난하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여러 경험을 하나로 묶는 이런 공동의 표지는 상상력을 넓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가난하게 만드는가. ‘바다’라는 단어는 수많은 감각과 장면을 품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너무 쉽게 하나의 이름 아래 평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문제를 가장 예민하게 다룬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베르그송이다.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성과 언어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붙잡기보다, 행동과 유용성에 맞게 잘라서 다룬다고 보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없이 흐르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빠르게 식별하고 구분할 수 있는 표지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흐름을 하나의 명사로 묶고, 연속적인 감각을 몇 개의 구분된 개념으로 정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다’라는 말은 바다의 모든 모습을 담아내는 이름이 아니라, 현실의 풍부함을 어느 정도 희생하고 얻은 편의적 기호다.

실제로도 그렇다. 바다는 물결의 반짝임, 바람의 결, 냄새, 습도, 소리, 두려움, 멀어짐과 가까워짐 같은 무수한 요소가 끊임없이 섞이며 변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복잡한 흐름 전체를 ‘바다’라는 한 단어로 불러 버린다. 그렇게 이름 붙이는 순간, 살아 움직이던 장면은 어느 정도 굳어진다. 특히 이미 익숙한 전형적 이미지가 있을수록 더 그렇다. ‘바다’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푸른 수평선과 모래사장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면, 심해의 압력감이나 항구의 탁한 냄새, 폭풍우 속의 공포 같은 바다는 뒤로 밀려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의 표지는 실제로 상상력을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곧장 언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같은 단어가 오히려 내가 알지 못했던 타인의 바다를 만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바다를 오직 부산의 한 장면으로만 떠올렸다면, 누군가의 말과 글을 통해 심해의 바다, 겨울의 바다, 난파의 바다,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바다를 새롭게 배우게 될 수 있다.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도 언어지만, 내가 가진 경험의 경계를 넘어가게 해 주는 것 역시 언어다.

따라서 공동의 표지는 상상력을 단순히 파괴하거나 보존하는 한쪽의 힘만 갖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세계를 건너가게 만드는 통로가 된다. 결국 상상력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언어 그 자체라기보다, 언어를 하나의 완성된 정의로 닫아 버리는 태도일 가능성이 크다.

3. 언어 이전의 감각층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바다’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마주하는 감각의 층위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이를테면 아직 바다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 먼저 밀려오는 짠 공기, 피부에 닿는 습기, 발밑 모래의 감촉,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같은 것이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정말 언어 이전의 상태로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현상학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후설은 우리가 판단을 내리고 개념으로 정리하기 이전에도 이미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층위를 전술어적 경험, 곧 아직 문장과 개념의 형태로 정식화되기 전의 경험으로 이해했다. 바다를 보고 나서 ‘저것은 바다다’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밝음과 넓음, 움직임과 반짝임, 혹은 낯설음과 두려움 같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 점을 더 몸의 차원에서 강조했다. 그의 관점에서 감각은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순수한 표상이 아니라, 세계와 몸이 맞닿으면서 생기는 살아 있는 관계다. 바다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앞의 대상을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몸이 바람과 습도와 소리 속에 놓이면서 하나의 장면 전체와 관계 맺는 일이다. 그래서 언어 이전의 감각층은 어떤 추상적 공백 상태라기보다, 언어보다 먼저 우리의 몸이 이미 세계와 얽혀 있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감각층이 언어와 완전히 단절된 채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바람의 차가움, 공기의 짠맛, 눈앞의 반짝임처럼 아직 분리되지 않은 인상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은 곧 그 안에서 반복되는 결을 가려내고, 그것을 기억 속의 다른 경험들과 느슨하게 연결하기 시작한다. 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전술어적 경험은 이후의 판단과 개념화를 위한 바탕이 되고,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는 몸이 이미 세계 속에서 방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감각은 점차 하나의 의미 있는 장면으로 응집된다.

다시 말해 언어는 바깥에서 감각 위에 갑자기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 속에서 두드러지는 차이와 리듬을 따라 서서히 형성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그저 밝음과 넓음, 출렁임과 소리로 주어졌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탁 트여 있다’, ‘짠 냄새가 난다’, ‘파도가 친다’ 같은 표현으로 나뉘고, 마침내 우리는 그것을 ‘바다’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게 된다. 이런 점에서 언어로 층위가 올라간다는 것은 순수한 감각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흘러가던 감각이 기억과 주의, 비교와 표현을 거치며 점차 공적으로 나눌 수 있는 의미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뜻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부산의 바다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이미 완성된 ‘바다’라는 단어라기보다, 햇빛의 번짐과 모래의 질감, 아이들의 움직임, 그 순간의 공기감 같은 감각의 묶음에 가깝다. 다만 이러한 감각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붙잡기 위해 결국 하나의 이름 아래 정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질문이 생긴다. 언어 이전의 감각층이 분명 존재한다면, 인간은 왜 끝내 그것을 언어로 옮기려 하는가.

4. 그렇다면 언어는 왜 사라질 수 없는가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언어가 때로 상상력을 제한하고, 또 언어 이전의 감각층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왜 끝내 언어를 떠날 수 없는가. 왜 사람은 순수한 감각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자꾸 이름을 붙이고, 말로 옮기고, 의미를 정리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그에 따르면 의미란 오직 내면에 떠오른 사적인 감각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 어떤 말을 제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 공유 가능한 사용 속에서만 확인된다. 내가 어떤 장면을 보고 마음속으로만 ‘이것이 내 바다다’라고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감각을 다시 불러오고, 다른 사람과 나누고, 비교하고, 수정하고,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면 결국 말이 필요하다. 언어는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생각을 나중에 포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이 사회적으로 모습을 갖추게 되는 조건이 된다.

여기에는 기억의 문제도 있다. 순수한 감각은 그 순간에는 풍부하지만 오래 붙들리기 어렵다. 바다 앞에 섰을 때의 공기와 떨림은 강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진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붙잡기 위해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그때의 바다’라고 부른다. 언어는 흐르는 경험을 완전히 보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손잡이 역할을 한다.

또한 언어는 타인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다리이기도 하다. 내게 바다가 부산의 밝은 풍경이라면, 다른 사람의 말은 내가 몰랐던 바다를 알려 준다. 누군가가 폭풍우 치는 겨울 바다를 이야기할 때, 또 다른 누군가가 심해의 정적을 이야기할 때, 나는 내 경험만으로는 닿을 수 없던 새로운 바다를 간접적으로 갖게 된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각자의 바다를 가질 수는 있어도, 서로의 바다에 접근하기는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언어는 사라질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는 도구여서가 아니라, 인간이 경험을 기억하고, 정리하고, 타인과 공유하며,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언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전달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언어는 늘 부족하고, 언제나 어떤 잔여를 남긴다. 바다는 언제나 ‘바다’라는 말보다 더 넓고, 더 깊고, 더 많은 감각을 품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버리기보다, 언어의 한계를 의식하면서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다.

맺음말

‘바다’라는 하나의 단어를 따라가다 보면, 언어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같은 말 아래 서로 다른 바다가 가능한 이유는 언어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경험을 느슨하게 묶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동의 표지는 때로 세계의 풍부함을 줄여 상상력을 가난하게 만들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는 언어 이전에 먼저 다가오는 감각의 층위를 분명 경험하지만, 그 감각을 붙잡고 서로 나누기 위해서는 다시 언어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언어를 완전히 신뢰하거나 완전히 불신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가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 주는 동시에 일부를 닫아 버리기도 한다는 점을 함께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바다’는 단지 하나의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감각, 상상과 개념, 개인의 경험과 공동의 소통이 서로 교차하는 자리다. 그래서 바다를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풍경을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이름 붙이며, 어떻게 타인과 나누는지를 함께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