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신에 대한 질문은 대개 평온한 시간보다 삶이 무너지는 순간에 더 날카롭게 떠오른다. 세상이 아름답고 질서 있게만 보일 때 신은 세계의 창조자나 도덕의 근거로 비교적 쉽게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 고통, 부당한 죽음, 끝내 응답받지 못한 기도 앞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신이 있는가”만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 신은 세계를 다스리는가, 아니면 품는가”, “사랑뿐 아니라 미움과 원망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같은 질문으로 옮겨 간다. 이번 논의도 바로 그런 자리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전통적인 전능신, 즉 세계를 위에서 통제하고 필요할 때 개입하는 신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신, 그리고 세계의 모든 고통과 사랑, 심지어 신을 향한 미움마저 받아들이는 신에 관해 묻고자 했다.
아이의 비극과 과정신학의 첫 대답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예시는 비극적인 한 아이의 사례다. 어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던 아이는 늘 굶주림 속에 놓여 있었고,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손길도 오지 않았다. 며칠 뒤 그 아이는 괴한에게 피습당해 살해되었고,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했지만 아무 구원도 경험하지 못했다. 아이는 신을 미워했고, 배신감을 느꼈다. 이 사례는 단순히 “왜 세상에 악이 있는가”를 묻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직접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신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 신은 여전히 신이라 불릴 수 있는가”를 묻게 만든다. 과정신학의 논의는 바로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으려는 데서 의미를 가진다.
과정신학은 이 사례 앞에서 먼저 몇 가지를 말하지 않는다. 아이의 죽음이 더 큰 선을 위한 계획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이 아이를 시험하기 위해 그런 비극을 허락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 아이의 죽음을 나중에 어떤 더 큰 질서나 사회적 의미로 정당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 사건은 먼저 악이고, 파괴이며, 설명되기 전에 애도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과정신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전통적 변증론과 거리를 둔다. 이 비극은 좋은 결과를 위한 재료가 아니며, 신의 비밀스러운 섭리를 미화하는 도구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정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가장 핵심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신은 아이의 고통을 원하지 않았고, 그 죽음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신은 전통적인 의미의 전능한 군주처럼 세계의 모든 사건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존재도 아니다. 신은 세계에 끼어들어 모든 비극을 마법처럼 없애는 절대 권력이 아니라, 매 순간 더 나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관계와 생명을 향해 세계를 설득하는 존재다. 따라서 아이가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과정신학 안에서도 그대로 남는다. 이 점은 과정신학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장점은 신을 잔혹한 방관자로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고, 약점은 여전히 “그래도 왜 구해내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과정신학은 적어도 이렇게는 말한다. 그 아이의 굶주림, 공포, 마지막 기도, 절망, 그리고 신을 향한 원망과 미움까지 모두 신에게 실재한다. 그 고통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으며, 아무 의미 없이 버려지지도 않는다. 신은 그 아이의 마지막 순간을 외부에서 무심히 본 것이 아니라, 그 비극을 자기 안에 받아들인다. 이때 신은 사랑만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배신감과 분노까지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과정신학에서 아이의 신에 대한 미움은 불경한 잡음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상처 입은 관계에서 나오는 가장 정직한 항의로 이해된다. 이 지점에서 과정신학의 신은 심판의 신보다는 동행의 신, 통치의 신보다는 수용의 신에 가까워진다.
1. 우리가 처음 붙잡은 신의 방향
이런 관점은 우리가 처음 붙잡았던 신의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우리는 신을 세계 바깥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절대 권력자로 보기보다, 세상의 모든 사랑과 미움, 고통과 기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존재로 생각해 보고자 했다. 말하자면 신은 단순히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할 수 있도록 바탕이 되어 주는 근원이면서 동시에 세계가 낳는 모든 것을 떠안는 깊이로 이해되었다. 이 신은 인간의 아름다운 고백만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버리지 못한 상처와 분노, 심지어 신을 향한 원망까지도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신 개념에서는 경배와 항의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신에게 따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따짐마저 신과의 관계 속에 남는다.
2. 존재론적 신과 과정신학의 차이
이 지점에서 존재론적 신과 과정신학의 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존재론적 신은 무엇보다 “가장 강한 존재자”가 아니다. 그는 세상 안에 있는 대상들 중 하나처럼 비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이다. 존재론적 신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신이 세계 안의 개체가 아니라 세계의 바탕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신은 사물처럼 관찰되거나 측정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사건에 개입하는 행위자 이전에, 존재 자체를 떠받치는 심연으로 이해된다.
반면 과정신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세계를 고정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리고 신 역시 이 과정과 무관한 절대적 고정점으로 남지 않는다. 신은 세계와 실제로 관계를 맺고, 각 순간에 더 나은 가능성을 제시하며, 세계가 겪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받아들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신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면, 과정신학의 신은 그 근원이 세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가 주로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면, 다른 하나는 그 깊이가 세계의 역사와 고통에 어떻게 연루되는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3. 과정신학의 신이 가진 핵심 성격
과정신학의 신이 가진 핵심 성격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신이 아니다. 과정신학의 신은 무엇이든 즉시 바꿀 수 있는 군주가 아니라, 자유로운 세계와 관계하면서 가능한 최선의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다. 여기서 신의 힘은 강압보다 설득에 가깝다. 둘째, 그는 매 순간 더 나은 가능성을 여는 신이다. 세계는 이미 완성된 각본이 아니라 계속 생성되는 현실이므로, 각 순간에는 다른 방식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과정신학은 이 가능성을 신이 제시하는 “호소” 혹은 “유인”으로 이해한다. 셋째,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신이다. 세계의 기쁨과 아름다움뿐 아니라 상처, 악, 실패, 미움까지도 신 안에 보존된다. 넷째, 그는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 신이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불변성과 무감각함이 완전성의 표지처럼 여겨졌지만, 과정신학은 오히려 타자의 고통에 실제로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을 더 깊은 완전성으로 본다. 사랑은 언제나 영향을 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4. 과정신학이 인간에게 주는 가치
이런 신 이해는 인간에게도 분명한 가치를 부여한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관계의 가치다.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고립된 원자나 자기완결적 실체가 아니다. 인간은 타인, 사회, 자연,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삶의 의미 또한 혼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생겨난다. 이 점은 윤리의 성격까지 바꾼다. 누군가를 해친다는 것은 단지 한 개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일이 아니라, 관계의 장 전체를 훼손하는 일로 이해된다.
둘째로, 과정신학은 자유와 응답의 가치를 강조한다. 신이 인간을 강제로 조종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단순히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제시되는 더 나은 가능성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다. 이때 자유는 제멋대로 선택하는 능력이라기보다, 더 좋은 방향을 알아보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인간에게 존엄과 함께 책임을 부여한다. 내 선택은 사소하지 않으며, 세계의 과정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
셋째로, 과정신학은 공감과 연민의 가치를 강화한다. 신이 세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안에 품는 존재라면, 신을 닮아 간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이때 수용은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삭제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면서 그 파괴를 홀로 떠넘기지 않는 것이다. 결국 과정신학의 신은 인간에게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설명보다 동행이 먼저다”라는 윤리적 감각을 가르친다.
넷째로, 과정신학은 창조성의 가치를 준다. 세계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지고 있으므로, 인간은 주어진 세계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된다. 예술과 과학, 정치와 교육, 돌봄과 연대는 모두 이 창조성의 다른 표현이다. 특히 처음에 제시한 아이의 사례를 다시 떠올리면, 과정신학은 신의 응답을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적으로만 기대하지 않게 만든다. 오히려 인간 공동체가 그 아이에게 응답했어야 했고, 사회 제도와 타인의 책임이 그 아이에게 하나의 구원의 손길이 되었어야 했음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과정신학은 인간에게 매우 무거운 사회윤리적 책임을 부여한다.
다섯째로, 과정신학은 희망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한다. 여기서 희망은 “모든 일이 결국 잘될 것이다”라는 낙관이 아니다. 오히려 비극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비극이 완전히 무의미한 잔해로 폐기되지는 않는다는 믿음이다. 인간의 고통과 실패, 심지어 신을 향한 원망조차 신 안에 받아들여진다면, 삶의 상처는 단순히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미의 차원 속에 붙들린다. 이 희망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피상적 위로보다 더 진지한 힘을 가질 수 있다.
5. 인간은 이 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이런 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먼저 인간은 이 신을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많은 종교적 기대는 신을 문제 해결사로 상정한다. 하지만 과정신학의 신은 내 삶을 대신 정리해 주는 관리자가 아니다. 그는 매 순간 더 나은 가능성을 여는 근원이고, 내가 그 가능성에 응답할 수 있도록 부르는 존재다. 이런 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적을 기다리는 태도보다 삶의 한가운데서 더 나은 가능성에 민감해지는 태도에 가깝다.
또한 인간은 이 신을 고통의 제거자보다 고통의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쉬운 태도가 아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본능적으로 문제를 없애 줄 강한 구원자를 원한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신은 모든 고통을 즉시 제거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짊어진다. 따라서 이 신앙은 단순한 해결의 종교라기보다 동행의 종교에 가깝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충분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과정신학의 진실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준다.
인간은 또한 이 신을 완성된 답보다 살아 있는 대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과정신학의 세계는 열려 있으며, 신앙 또한 정지된 체계가 아니라 계속 갱신되는 관계로 이해된다. 그래서 질문, 의심, 항의는 반드시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깊은 관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처음의 아이가 신을 미워했다는 사실 역시 이 틀 안에서는 무의미한 불신앙이 아니라, 상처 입은 관계의 끝까지 밀어붙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과정신학은 바로 이런 항의를 품을 수 있는 신을 말하려 한다.
6. 과정신학의 한계
그러나 이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과정신학의 한계는 분명하다. 가장 큰 한계는 역시 신의 약함처럼 보이는 지점이다. 인간은 여전히 묻는다. 함께 아파하는 것은 알겠는데, 왜 실제로 막지 못했는가. 받아들임은 알겠는데, 왜 살려내지 못했는가. 과정신학은 전능신의 잔혹한 방관이라는 문제를 어느 정도 피해 가지만, 대신 “그렇다면 그런 신은 정말 신이라 불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이 비판은 가볍지 않다. 특히 아이의 비극 같은 사례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또 다른 한계는 수용의 개념이 잘못 이해될 위험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신을 말할 때 자칫 악마저도 결국 더 큰 조화 속에서 흡수된다고만 말하면, 고통의 날카로움이 무뎌질 수 있다. 그래서 과정신학은 언제나 “수용은 정당화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하게 붙잡아야 한다. 아이의 죽음은 끝내 악이며, 그 죽음이 신 안에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그 악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비극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어야 한다.
마지막 한계는 구원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과정신학은 비극을 형이상학적으로 수용할 수는 있어도, 역사적 차원에서 그 비극을 되돌려 놓지는 못한다. 아이는 실제로 구조되지 못했고, 정의는 즉시 실현되지 않았으며, 기도는 가시적인 응답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과정신학의 구원은 대개 역사적 구출보다는 존재론적 보존에 가까워진다. 어떤 사람에게 이것은 깊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약한 위로로 느껴질 수 있다. 결국 과정신학은 많은 경우 사랑받을 수 있는 신, 함께 고통받는 신을 제시하지만,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신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맺음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신학이 지닌 중요한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은 신의 위대함을 단순한 힘의 절대성에서 관계의 충만성으로 옮겨 놓는다. 신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군주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조각을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이 신은 사랑뿐 아니라 미움도, 찬양뿐 아니라 항의도, 희망뿐 아니라 절망도 자기 안에 품는다. 그리고 인간에게도 같은 방향의 삶을 요청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설명하지 말 것, 더 나은 가능성에 응답할 것, 구조적 악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말 것, 그리고 비극 속에서도 의미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는 희망을 붙들 것. 바로 이런 점에서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전능신 이해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유가 된다.
결국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신의 위대함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에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끝까지 받아들이는 사랑에 있는가. 과정신학은 분명 후자에 더 가까운 답을 준다. 그리고 그 답은 특히 고통의 현실 앞에서 더 인간적이고 더 정직하게 들린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쉬운 답이 아니다. 아이의 비극 앞에서 과정신학은 그 죽음을 정당화하지 못하며,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 죽음이 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 아이의 마지막 기도와 마지막 원망은 신 안에 남는다. 이 진술이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과정신학은 고통 앞에서 성급한 해답 대신, 상처와 함께 남아 있는 신을 말하려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신보다 세계를 품는 신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깊은 철학적 의미를 가진다.